운영자-[2004-07-30 04:13:42]

연극배우 원영애

[국정브리핑 2004-07-27 09:35]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연극과 노래와 막걸리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불타는 여자. 자기를 뛰어 넘어 항상 새로움에 겁도 없이 도전하는 여자. 원석(原石)으로 끝나는 인생을 거부한 여자. 그래서 갈고 닦는 마감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자신을 밀도 깊고 견고한 금강석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여자. 연극배우 원영애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연극배우 원영애.
원영애는 고려대학교에서 식품학을 전공했다. 천성적으로 끼가 있어서였는지 몰라도 원영애는 노는 것이 재미있어서 당시 여석기 교수가 지도를 맡았던 고대극회에 들어갔다. 극회회원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서 노래 부르고, 선배들에게 개기면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식품학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 대신 연극에 푹 빠졌다. <여우와 개구리>, <줄리어스 씨저>, <소> 등 대학재학시절에 공연했던 연극이다.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재미있어서 한 거지요. 그때 그렇게 지낸 것이 내 연극인생의 출발이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지금 내 나이 사십이 넘도록 시집도 못 갔어요. 나는 연극과 결혼했다고 생각해요. 오직 연극에 애정과 정열을 다 쏟고 있는 셈이지요. 이제 연극이 무엇인지도 좀 알 것 같구요." 원영애가 막걸리판에서 들려준 말이다.

나는, 97년 가을에 '충정로포럼'에서 그녀를 만났다. 매달 한번씩 만나는 이 모임에 그녀가 처음 나타난 날, 나는 상당히 술에 취해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맞은편에 나는 앉았는데 그녀는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그녀의 길게 늘어진 생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듯한 모습이 찍힌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고, 접혀진 명함 아래쪽에는 그동안 출연했던 연극제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실제의 얼굴과 명함 속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참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검정 투피스를 입었는데 얼굴은 개성이 강하고 눈빛은 강렬하면서도 남의 실수를 감쌀 수 있는 푸근함 같은 것이 있어 보였다. 앉아 있는 모습도 체중을 의자에 맡기지 않고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앉아있었다. 극히 사소한 동작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 아픈 상처 후비는 듯한 원영애의 노래에 매료돼

세미나가 끝나고 테이블을 옮겨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는데 상황에 따른 예절이 뛰어났다. 그리고 예쁘게 서고, 예쁘게 걷고, 예쁘게 앉았다. 내가 받은 첫 인상은 그랬다. 그 해, '충정로포럼' 망년회가 있었는데 무대에 나가 사회를 보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원영애에 매료되어 회원들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최유진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오금을 저리게' 하는 것이었다. 음색이 섹시하다고 할까, 내가 잊고 지내온 아픈 상처를 후비는 듯 심금을 울렸다. 몇 군데 술집을 전전하다가 새벽5시경에야 종로해장국집에서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그 뒤로 한 달에 한번은 만난 셈인데 으레 술이었다. 술을 마시다보면 자리를 이동하는 때가 있는데 원영애의 음주운전을 염려하면 "걱정되면 타지 마세요"하면서 운전석에 앉는다. "죽어도 영애와 함께 죽으면 좋지"하면서 옆 좌석에 앉은일이 있는데 정말 무시무시하게 달린다. 총알택시가 따로 없다. 살고 싶은 사람이 하는 운전이 아니다. 노래뿐 아니라, 운전에서도 사람을 '오금을 저리게'하는 것이었다. 정말 불을 간직한 여인의 정열이 아니고야 매사에 무모할 정도로 이렇게 신나게 살수는 없는 것.

98년 늦은 봄날, 원 영애와 함께 몇 사람이 등산을 했다. 축령산 옆에 있는 서리산을 갔다. 서리산의 정상 바로 아래 능선에 유명한 철쭉군락지가 있다. 백 년이 넘는 듯한 철쭉이 무리 지어 아름답게 핀 곳에 앉아 우리들은 막걸리를 마셨다. 이 때도 원 영애는 키 큰 철쭉 옆에 서서 꽃송이를 만지며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렀다. 철쭉과 원 영애의 노래가 어우러지니 천상 위에 초대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독립극장 막걸리판 2주년 기념식.
그 뒤로 원 영애는 나의 그리움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 '독립극장'이라는 연극단체의 대표로 있다. 독립극장이 있는 마포 사무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막걸리판'이 벌어진다. 매달 넷째 주 목요일 저녁에 푸짐하게 삼합(삭힌 홍어, 잘 익힌 돼지고기, 묵은 김치)을 곁들여 얼린 막걸리. 그리고 분위기를 돋우기 위하여 배경음악으로는 배 호의 노래가 준비된다. 연극, 영화, 음악, 문학, 언론, 광고,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여 정보와 생활의 지혜를 화기애애하게 나누면서 삼합 같은 조화를 이루는 모임이다. 어떤 분은 마술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분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노래를 하기도 한다.

이 막걸리판에 미국인 사진작가 두 명이 참석한 일이 있었다. 취흥이 고조되자, 원영애는 참석하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노래를 불렀다. '한네의 이별'이었다. 노래를 듣고 있던 미국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음악은 가사로 듣는 것이 아니라 곡으로 듣는 것이었다. 음악이야말로 국제 언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자리였다. 원영애의 노래는 영혼을 흔드는 신비가 있는 것일까,



세실극장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원영애.
그 일이 있은 뒤로 그녀를 좋아하는 막거리판 친구들이 '연극아~ 노래야~'라는 제목의 원영애 콘서트를 마련했다. 덕수궁 옆 세실극장에서 금년 4월 하순에 콘서트를 했는데 대성공이었다. 그녀는 20년 연극인생을 가슴으로 노래했다. 그녀의 노래에는 여인의 한(恨)같은 것이 서려있는 듯하고, 남모를 그리움을 안고 사는 이의 가슴에 부젓가락을 후비는 것 같은 아픔을 새삼 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나는 연극이 있고, 노래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콘서트를 마치고 그녀가 한말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당찬 포부가 있다. 연극 <치마>를 북한에 가서 공연하는 일이다. 연극 <치마>는 상해임시정부시절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정정화여사의 일대기를 연극무대에 올린 것인데 이 연극을 준비하기 위하여, 97년 중국에서 보낸 정정화여사의 삶의 흔적을 돌아보겠다면서 대장정의 행로를 따라 현지답사까지 했다. 원영애는 정정화여사가 쓴 '장강일기'를 보여주면서 나에게 이걸 서사시로 써보라고 권했고, 그녀는 이걸 반드시 연극무대에 올릴 것이라고 강한 집념을 피력했다.

아이.엠.에프 와중인지라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는 역사극을 무슨 수로 해낼 것인가? 좀 무모하게 보였다. 혼자서 기획하고 작가와 연출을 섭외하고 배역을 선정했다. 돈을 마련하느라고 동분서주했다. 그런데 원영애는 해냈다. <아, 정정화>라는 제목으로 98년 8월에 무대에 올렸다. 작은 여배우가 신념과 열정으로 이루어낸 더 없이 큰 무대였다. 정정화여사는 91년에 세상을 뜬 분이지만 이 연극을 통해서 다시 부활했고, 2001년 '이 달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 정정화>는 <치마>로 제목이 바뀌어 그 해 8월에 다시 공연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일본 공연을 했다. 오사카와 됴쿄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대 성공이었다. 510석의 객석이 4회 전회 만석을 이루었다.

◆ 정정화 여사 일대기 그린 연극<치마> 북한 공연 추진



연극 <치마>에서의 공연중인 원영애.
"가난한 민간극단으로서 '독립운동'하듯이 일본공연을 한 것인데 반응이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민단과 조총련관계자들이 이날만은 사이좋게 공연을 보고 분장실로 찾아와 격려를 해준 것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원 영애는 그때를 그렇게 회상했다. 돈을 목표로 한 상업극이 대세인 현실에서 비상업극에 매달리는 것은 현대판 독립운동이 아니면 정정화의 혼이 씌인 것인가?

"돈과 명예와 권력만이 가치로 숭상되는 요즘 세상에 정 정화여사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거울입니다. 일제시대 보장된 권력과 막대한 재물을 마다한 채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분한테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더구나 현안이 되어있는 친일문제를 반드시 청산해야만 역사의 진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치마>를 통해서 선열들의 민족정신을 바로 보고 계승해야하는 것이지요."

확실히 치마들이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시대가 왔다. 며느리의 치마, 아내의 치마, 할머니의 치마, 어머니의 치마, 누이의 치마, 이 모든 여성들의 치마야말로 그 역동적이고 생동적인 펄럭임이 있다. 원영애의 <치마>까지 가세하여 통일을 앞당기는 그 날이 어서 왔으면 한다. 불어라, '치마'바람이여.

국정넷포터 강상기 potica@hanmail.net
* 이 글은 인터넷신문 '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실렸습니다.

<강상기님은> 서울 석관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66년 <세대>지 제1회 시부문 신인문학상수상.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편력)시 당선. [저서]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시집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교육에세이 <자신을 흔들어라>(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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